2004년 7월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40시간 근무제가 실시되었다. 주40시간 근무제는 차근차근 그 범위를 넓혀가 2011년부터 모든 국민들이 주40시간 근무제에 따라 일하게 된다. 그러나 노는 날이 늘어 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걱정한다.

"이렇게 놀 때가 아닌데, 우리가 이렇게 먹고살 만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실제로 가장 먼저 주40시간 근무제를 실시한 은행권에서는 간부 직원들이 주말에 회사에 출근하거나 은행 근처 음식점이나 술집으로 부하직원들을 불러내 주말을 보내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놀아도 회사 근처에서 놀아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온종일 놀더라도 책가방만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놔둬야 마음이 편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한다.

"잘못하다가 IMF 위기가 또 오는 것 아냐?"

한 번 호되게 놀란 가슴은 웬만해서는 가라앉지 않는다. IMF 위기의 정신적 충격은 병뚜껑 여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가라앉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놀리는 수준을 넘어 '놀면 불한해지는 병'에 집단적으로 걸려버렸다.

사실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현상이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데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도망가기는 커녕 웃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과도한 불안과 공포는 정상적인 삶을 방해한다. 이를 '부적응적 불안maladaptive anxiety'이라 한다. 부적응적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위험한 상황이나 불안한 요인을 과민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반면 안정적인 상황이나 신호에는 둔감하게 반응한다.

쉽게 말해 불안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도 불안하게 만드는 신호를 찾아내 불안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약간의 경기침체 신호만 보여도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IMF 위기를 지나며 얻은 집단적인 부적응적 불안 때문이다.

불안한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흑백논리의 사고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 상황이든지 약간의 불안한 요인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안한 요인들만을 끄집어내 확대 해석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항상 위험한 상황만이 계속될 뿐이다. 행복하면 한 될 것 같고 즐거울 때도 왠지 불안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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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서자 이젠 먹고살 만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조금 즐거워도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포도주를 살금살금 들이켜면서도 골프채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왠지 불안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즐기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꼭 들어맞았다. IMF외환위기가 덜컥 터진 것이다. 한국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외국 언론의 비아냥거림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행복하면 안 돼. 즐거워하면 안 돼. 먹고살 만해도 그저 배불리 먹고 등 따습게 누울 수 있으면 될 뿐 이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안 돼."

우리는 집 안에 감춰두었던 금붙이들을 모아 내다 팔고 돌아서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샴페인만은 다시 터뜨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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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독일에서 머물렀던 불과 13년 만에 한국의 물건들은 독일 시장의 구석구석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한국의 위상 변화가 자랑스러웠다. 독일 학생들은 내게 물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이뤄낸 나라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런데 도대체 이런 엄청난 발전의 동력은 무엇인가?

흔히 우리의 경제 성장과 비교하여 독일의 '라인 강 기적'이 언급된다. 독일 역시 전쟁의 폐허 위에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 부흥은 우리의 경제 성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독일은 세계대전을 두 번씩이나 일으킨 나라다. 탱크, 비행기, 잠수함을 만들 수 있었던 엄청난 기술력을 가졌던 나라다. 그런 나라와 농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매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우리나라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는 없는 일이다. 독일과 우리는 출발점 자체가 달랐다.

지긋지긋한 굶주림에 대한 한이었다. 못 먹어서 누렇게 뜬 얼굴로 죽어가는 자식들은 이젠 제발 그만 보고 싶다는 절망에서 비롯되는 처절한 분노였다. 좌절과 고통의 밑바닥에서 우리 부모님들은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그 단순한 구호에 가슴이 저려오는 흥분으로 새벽마다 뛰쳐나갔다. 인간의 권리, 자유, 행복과 같은 것들은 어찌되었던 상관없었다.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는데 그깟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행복하면 안 되었다. 즐거우면 뭔가 불안했고 죄의식 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 자유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치였고 도덕적 범죄였다. 참고 인내해야 했다. 모든 관공서의 한쪽 벽에는 '근면' '성실'의 구호가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어찌 남들과 똑같이 해서 그 엄청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서 우리 국민들은 1960~1980년대를 거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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